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르주 첼리비다케 (문단 편집) == 여담 == 심한 여성혐오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유별난 성격(독설과 독선)과 더불어 치명적인 단점으로 보인다. [[http://agendamagazine.tistory.com/22|#]] 미국 출신의 여성 트롬본 연주자 에비 코넌트(Abbie Conant)는 뮌헨 필의 블라인드 오디션에서 합격했고, 이후 여성인 사실이 밝혀져 심사위원들이 경악했다고 한다. 가장 극렬한 반대를 한 이가 바로 첼리비다케. 여성 단원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 첼리비다케는 이후 블라인드 오디션을 없애버렸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그녀를 괴롭혔다. 수석 주자로 뽑힌 코넌트에게 실력을 이유로 세컨드 자리를 줬고, 대화를 위해 자신을 찾은 코넌트에게 "그냥 남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80년대 시대상을 반영하더라도 첼리비다케의 주장은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녀가 법적인 행동을 고민하자 첼리비다케에 호의적이던 뮌헨 시는 외국인 허가 취소를 언급하며 코넌트를 협박했다.[* 당시 3류 취급받던 뮌헨 필을 세계최고의 오케스트라로 만든 첼리비다케의 권력은 실로 막강하여 시 당국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를 본인의 의견 관철을 위해 악의적으로 이용한 것. 코넌트가 찾아간 독일여성인권사무국에서조차 자신들은 힘이 없으니 음악감독이 바뀔 때 까지 참고 기다리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결국 코넌트는 소송을 진행하였고, 자신이 남자보다 부족하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 신체검사까지 벌였다. 그러나 그 시각 첼리비다케가 코넌트 때문에 뮌헨 필을 떠날 것이고 그러면 단원들의 연봉이 삭감될 것이라는 악성 루머까지 돌았다. 첼리비다케는 재판정에 출석해 코넌트가 트롬본 주자에 부적합하다고 증언하였지만 재판은 코넌트의 승리로 끝났다. 그럼에도 첼리비다케는 코넌트에게 솔로 자리를 주지 않았고 남성 연주자 보조로 두었다. 심지어 낮은 급여를 줬고 이에 코넌트는 두 번째 소송을 시작했다. 90년대까지 이어진 소송은 슈피겔지를 통해 보도되며 큰 스캔들로 비화됐다. 뮌헨 시 당국은 첼리비다케를 변호했다. 그동안 첼리비다케는 계속 뮌헨 필을 떠나겠다고 압박했으며 실제로 한 시즌 지휘를 맡지 않아 극장 수입이 폭락했다. 1993년 코넌트가 최종심에서 승리했고, 수석지위를 맡을 것과 그동안 미지급된 보수에 대해서도 지급명령을 받았다. 코넌트를 괴롭혔던 뮌헨 시 담당자는 교체되었고 뮌헨 필 위원회 임원들도 재선에 실패했다. 코넌트는 현재 트로싱엔 국립음대 교수로 재직하며 최고의 트롬본 연주자로 인정받고 있다. [[레너드 번스타인|번스타인]]이 떠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그랬듯이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첼리비다케의 사후 내리막길을 타기 시작했다. 첼리비다케가 오기 전에 뮌헨 필이 아주 훌륭한 오케스트라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시원찮은 오케스트라도 아니었고, 첼리비다케 이후에 인지도 있는 지휘자들이 연이어 재임하고 있다. 첼리비다케 시절이 전성기였음은 분명하지만 이후 내리막을 탔다고 말하는 것은 정당치 못한 평가다. 그리고 첼리비다케는 특유의 독선적 성격으로 다른 지휘자들을 비난한 것으로도 꽤 유명하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전혀 음악을 만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음표도. 순전히 음표 공장에 불과하다. [[칼 뵘]]: 마치 감자푸대가 지휘하는 것과 같다.[* 사족으로 그가 지휘할 때 구부정하게 서 있는 폼을 빗대어 낙타라고도 했다.] 그는 평생 음악을 한 마디도 지휘해 본 적이 없다.[* 영어 번역 원문: didn't conduct a single bar of music in his life. 혹은 has not conducted a single bar of music in his life. 혹은 Karl Böhm never conducted a note music . 혹은 He never led music in his life.]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끔찍하다.[* horrible] 그는 재능있는 사업가이거나 아니면 청각장애인이다. 카라얀이 유명한 것은 코카콜라가 유명한 것과 같은 이치다. [[게오르그 솔티]]: 뛰어난 피아니스트지만, 지휘자로서 그저그런 귀를 지녔으며, 테크닉도 형편없다. [[라파엘 쿠벨릭]]: 큰 음악가이지만, 작은 지휘자다.[* Ein großer Musiker, ein kleiner Dirigent.][* 독일어 groß는 위대하다(great)는 뜻도 있지만, 단순히 물리적으로 크다(big)라는 의미도 있다. 쿠벨릭이 장신에다가 풍채가 크지만, 음악적으로는 작은 인물이라고 비꼰 것.] [[레너드 번스타인]]: 그는 내 지휘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자다.[* 하지만 나중에 그는 번스타인 사후에 자기가 봤던 지휘자 중에서 재능이 넘쳤다고 이야기했다.] [[카를로스 클라이버]]: 그는 음악이란 무엇인지 한 번도 체험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로린 마젤]]: 칸트를 논하는 두 살 짜리 어린애 [[클라우디오 아바도]]: 고통스럽다(고문이다).[* Eine Qual.] 전혀 재능이 없는 자. 화가 난다. 나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3주를 버틸수 있지만 그가 지휘한 음악을 들으면 3시간 안에 심장마비가 일어날 것이라고 장담한다. [[리카르도 무티]]: 비범한 재능을 지녔다. 하지만 토스카니니만큼이나 무지하다.[* Hat ungewöhnliches Talent, ist aber ein Ignorant wie Toscanini] 첼리비다케의 독설에 대응하여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슈피겔지에 첼리비다케를 비꼬는 글을 투고한 것은 유명하다. 클라이버는 이미 죽어 천국에 가 있을 토스카니니의 이름을 빌어 첼리비다케를 비난했는데 모차르트, 베토벤, 브람스, 브루크너 등이 하나같이 첼리비다케의 연주템포가 틀렸다고 지적했으며, 유명한 선불교의 권위자도 첼리비다케가 선불교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꼬집은 것.[* 클라이버의 말이지만 이 투고글에 나오는 토스카니니(?)의 또 다른 말에 의하면 푸르트뱅글러는 그런 사람 모른다고 하고(...) 브루노 발터는 죽도록 웃어댔다면서 첼리비다케의 그런 다른 지휘자 평가를 조롱했다.] 나중에 여행차 일본에 갔던 클라이버와 공연차 뮌헨 필을 이끌고 일본에 갔던 첼리비다케가 같은 루프트한자 비행기[* 클라이버가 자주 연주하던 바이에른 국립 관현악단과 뮌헨 필하모닉 모두 뮌헨에 기반한 악단들이다.] 일등석에 앉았으나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일화도 유명하다. 작곡가로서도 4곡의 교향곡과 피아노 협주곡 등을 작곡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했지만, 현재까지 녹음된 곡은 [[UNICEF]] 기금 모금을 위해 [[슈투트가르트 남서독일 방송 교향악단]]과 1979년에 녹음하여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음반으로 낸[* 그리고 이 녹음은 생전에 첼리비다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유일한 음반이다.] 어린이를 위한 오케스트라 모음곡 '주머니 속의 정원' 1곡뿐이다. 원래 흑발의 심한 곱슬이었다. 그러나 흰머리가 나면서 차츰 직모로 바뀌었다. 1970년대초 아직 검은 머리와 흰머리가 공존하던 시절도 꽤 곱슬이었는데, 70년대말 완전히 백발로 바뀌면서 직모 헤어스타일로 완전히 바뀌었다. [[분류:지휘자]] [[분류:루마니아의 인물]] [[분류:1912년 출생]] [[분류:1996년 사망]][[분류:네암츠 주 출신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